바람결에 흐르듯

폴고갱(1848-1903,프랑스,후기인상파) 본문

외국화가

폴고갱(1848-1903,프랑스,후기인상파)

노마GG 2013. 6. 27. 14:08

■ 고갱의 생애는 생애는 파란만장하다. 아버지는 자유주의자로서 망명하여 남니 리마로 가던 중에 죽고, 그후 고갱은 7세 때에 프랑스에 돌아온다. 바다를 동경하여 선원이 되어 남미도 항해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그만두고 화가로서 새출발을 한다. 그러나 회화는 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돈은 다 떨어져서 아내의 고향인 덴마크로 가는데 덴마크에서 발표한 일도 실패하였다. 고갱은 처자를 남겨두고 단 하나의 어린아이를 데리고 파리에 나타났다. 그러나 생활은 궁핍하여 포스터를 붙이는 노동도 했다.

그리고 1886년부터 브리타뉴의 퐁 타뱅으로 가서 젊은 화가들과 만나 인상파의 그림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창시하였다.

평면적인 채색으로 장식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그의 화풍을 따르는 젊은 화가들과 '퐁 타벵(Pont-Aven) 파'를 창립하였다.

파리로 돌아가서는 '고흐'를 만났다. 그러나 고갱에게는 순수함에 대한 정열이 있었다. 문명의 거짓을 좋아하지 않았고, 거짓이 없는 순수함속에는 꿈이 있었고, 거기에는 시(詩)가 살아있었다. 고갱은 1887년 봄에 남미로 건너갔고, 다시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지만 병으로 인한 고뇌로 귀국한다. 그리하여 이듬해 퐁 타뱅으로 다시 가 거기에서 젊은 화가들과 만나 새로운 회화의 이론을 주장한다.

이어 고흐의 초대로 아를르에도 가지만 그 우정은 깨져 버려 재차 순수함을 그리워한다. 그 염원을 달성한 것은 1891년으로 고갱은 태평양의 타이티섬 민중들의 순수한 삶과 개성에 감동하여 수많은 작품을 그려 낸다. 고갱은 한번 파리에 돌아오지만 1895년에는 타히티에 돌아갔지만 그림 제작하는 것 외에는 궁핍과 병과 싸우는 생활이었고, 1901년에 도미니카 섬으로 옮겨가서 고독한 생애를 마친다. 그는 세잔, 고흐 등과 함께 후기인상파의 한 사람인데 세잔은 객관적 또는 공간적인 것을, 고흐는 주관적인 것을 제재로 하였으나 고갱은 장식적인 것의 부활을 주로 하였다. 그의 강렬하고도 새로운 장식풍의 그림은 후세 그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네바모아

▼어마, 질투하고 있니

▼해변에서

▼희화적 자화상

▼모자를 쓴 자화상

▼꿈

▼열대의 식물

▼테 파토르마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의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1890-91)

▼아름다운 안젤

▼세명의 타이티인

▼해변의 기수들

▼이아 오라나 마리아

▼브루타뉴의 추수

▼4명의 브르타뉴 무용수

▼망고의 여인

▼부채가 있는 정물

▼부채를 든 아가씨

▼켄버스 앞의 자화상

▼야회복을 입은 메트고갱

▼빨간 꽃과 유방

▼선물

▼미개의 시

▼언제 결혼하니

▼나부습작

▼아이타 파라리

▼부르는 소리

▼미개한 이야기

▼바이루마치

▼타이티의 여인들, 해변에서(1891)

▼설교후의 환영 또는 야곱과천사와의 싸움(1888)

▼신의 날(1894)

▼식사(1891)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

▼장날(1892)

▼Breton Girls Dancing, Pont-Aven(1888)

▼백마

▼모성

▼해변의 두 소녀

▼목욕하는 브르타뉴의 아이들

▼Still Life with Profile of Laval(1886)

▼나부(1892)

▼안녕하세요 고갱씨(1889)

▼바히네 노 테 치아래

▼슈잔 밤부리지

▼과일을 들고 있는 여인(1893/그대는 어디로 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