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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보성 낙안읍성 민속마을

노마GG 2020. 12. 7. 08:46

■ 2020. 12. 05

■ 낙안읍성 민속마을

■ 읍성은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성으로 종묘와 왕궁이 있는 도성과는 구별된다. 읍성의 원류는 중국이며 청동기 시대부터 축조되었는데, 우리나라에도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 낙랑의 치소였던 토성이 있고, 대방군의 치소로 알려지는 토성도 사리원 동쪽에 남아있던 시기에는 현에도 작은 읍성이 있었고, 주로 넓은 구릉이나 평야지대에 토루로 쌓았다. 

읍성은 부, 목, 군, 현 등 행정 구역의 등급에 따라 크기에 차이가 있었고, 크기는 주민의 수와 관계있었다. 조선시대 내륙 지방에는 비교적 큰 고을에만 읍성이 있었고, 해안 근처에는 거의 모든 고을에 읍성이 있었다. 크기는 큰 읍성은 900미터 이상이었고, 중간 규모는 약 450~900미터였으며, 작은 것은 300미터에 못 미치는 경우도 있었다. 세종실록과 지리지에는 남부지역에 69개소, 동국여지승람에 95개소, 동국문헌비고에 104개소 읍성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전국 곳곳에 설치되었다. 이들 읍성은 조선 말기까지 존재했으나 1910년 일본의 읍성 철거령 때문에 대부분 철거되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읍성 중 대표적인 것은 정조 때 세운 수원읍성이다. 또한 낙안읍성, 비인읍성, 해미읍성, 남포읍성, 동래읍성, 보령읍성, 진도읍성, 경주읍성, 거제읍성, 홍주읍성, 언양읍성 등이 있는데 낙안읍성은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 중 하나로 1983년 국내 최초로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행정 구역상 3개 마을(동내리, 남내리, 서내리) 85여 가구 약 300여 명이 100여 채의 초가집에 거주하고 있다. 관광용으로 세트화한 민속촌이 아니라 실제 남도 사람들의 삶이 배어있는 것이다.

순천 조계산 끝자락에 있는 낙안읍성은 마한시대부터 선인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고려시대부터 양악, 낙안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낙안읍성이 현재처럼 마을로 등장하는 계기는 인조 4년(1626) 임경업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하면서 부터고 태조 때 왜구침입을 막기위해 김반길 장군이 흙으로 축조한 것을 인조 때 돌로 쌓아 지금 형태를 갖추었으며 세종 때 석성으로 축조했다는 설도 있다.

마을은 동북쪽으로 지리산, 서쪽으로 무등산과 이어져 있고, 남으로는 남해 여자만(汝自灣)의 해풍을 받는 낙안 들판이 펼쳐지는 해발 50미터의 분지형이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지형이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이라고 한다. 멀리 부용산을 넘어 말봉이 있고, 금전산을 넘어 동북쪽에 옥녀봉(520미터)이 있는데, 산자락이 금전산까지 이어져 옥녀가 머리를 감아 빗고 장군에게 투구와 떡을 드리기 위해 거울 앞에 단정히 앉아 화장하는 모습 같다는 것이다. 이곳의 특징 중 하나는 깊은 우물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전통 마을 중 여러 곳이 풍수지리에서 행주형으로 성내에 깊은 우물 파는 것을 금했는데, 낙안읍성도 그런 예다. 배는 물에 떠다니지만 언제나 가라앉을 위험이 있어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한 것이다. 다행히 마을 중앙에 1미터 정도의 낮은 천연샘이 있어 식수공급은 걱정없었다. 풍수에서 깊은 우물을 파는 것은 금지했지만 천연 우물은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를 배 안에 고인 물로 인식했기 때문이고, 배 안에 들어온 물은 퍼내야 안전하므로 천연 우물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낙안읍성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념탑

▼낙안읍성 입구

▼낙안읍성 주 진입로..

▼낙안읍성에서 바라본 금전산..

▼낙안읍성 성곽 위로..

▼오봉산과 낙안읍성 밖 마을..

▼김장준비를 하고 있다.

▼성북마을 방향의 금전산..

▼두부만드는 집..

▼자연염색 체험집..

▼낙안읍성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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