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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서울 마포 난지생명길 2코스

노마GG 2021. 7. 14. 19:24

■ 2021. 07. 12

■ 서울 마포 난지생명길 2코스

■합정역 8번 출구》강변북로 입구(일산방향)》망원정》망원초록길》한강시민공원》양화나루(양화진)》절두산 순교성지》현석 나들목》

      토정나들목》삼개포구(마포나루)》공덕역

■ 트레킹 거리 : 8km

■ 트레킹 시간 : 2시간 20분

■ 난지생명길 1,2코스를 탐방하면서 난지도와 떨어있는데 왜 난지생명길이라는 이름이 사용이 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는데 역시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수종과 조경이었다. 한 여름 무더위를 피할 곳 없어 다리 밑에서 쉬어야 하니 시민공원 역할로서 아쉬웠다

한강을 따라 보여지는 여의도 스카이라인만큼은 정말 아름다웠으니 차라리 "한강 수변길"이 어울지 않나 싶다.

   

▼개념도

▼트레킹도

▼합정역 8번 출구에서 나와 강변북로 일산방향으로..

▼강변북로 진입로 옆으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망원정

▼망원 초록길

▼한강시민공원

▼난지생명길 2코스   

▼양화대교(우)

▼당산철교와 잠두봉선착장

▼양화나루(양화진)

   본래 양화진은 양천 양화리의 선유봉 아래 있는 백사장에 있던 나루를 일컫는 이름이었는데, 강의 반대편 쪽 잠두봉 아래의 나루도

   양화나루로 부르게 되었다. 양천의 양화리는 버드나무가 우거져 버들꽃이 필 무렵 장관을 이루어서 양화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당산철교 남단 방향 - 영등포구 당산동

▼양화진 강변북로 고가 아래에서 바라본 당산철교 남단 방향..

■ 절두산 순교성지

절두산에서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은 이의송(李義松)으로 1866년 10월 22일 부인·아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후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까지 헤아려 천주교측에서는 약 1만 명가량의 순교자가 이곳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특히 선참후계라 하여 심문과정 없이 바로 처형했기 때문에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고 하며 이때문에 처형당한 사람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잘린 목은 그대로 한강에 던져졌고 머리가 산을 이루고 강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고 한다. 순교 100주년이 되던 해인 1966년 순교자기념관이 건립되었으며, 기념관은 성당·박물관·경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양화진에는 개신교가 전래되면서 한국선교에 헌신했던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묻혀 있는 외인묘지가 있다. 절두산은 봉우리 모양에 따라 가을두, 용두봉, 잠두봉이라고 불린다.

절두산 유래는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가 이곳 양화진까지 진격해온 적이 있는데, 이에 흥선대원군은 "양이로 더럽혀진 한강의 물을 서학 무리들 피로 씻어야 한다"고 하면서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고, 이와 함께 수많은 교인들을 붙잡아 양화진 근처 산봉우리에서 목을 잘랐다고 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순교자 기념관

▼꾸르실료회관

▼천주교 순교자 박물관

▼김대건신부 동상

▼외국인 선교사 묘원

▼촛불을 켜놓고 기도(참배)하는 곳..

▼순교자들을 의인화한 출입문 디자인이 독특하다

▼마포 성수동에 사무실이 있을때 보지 못했던 건물이 그동안 멋지게 들어섰음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 전통 항아리가 웬지 어울리지 않지만 정겨움이 묻어나니..

▼난지도와 상관없이 조성된 수목은 난지생명길이라는 이름에 걸맞지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들이 한여름 더위를 피할 곳도

    없어 한강시민공원으로서 역할도 미비하니 차라리 한강둘레길이라고 함이 좋을 듯 싶다.

▼주변 환경을 보아 한강수변길이 더 어울릴 듯 하기도 하다 

▼서강대교와 여의도 방향..

▼여의도 고층 빌딩 스카이라인 - 한때는 63빌딩(맨 좌측)이 한국의 대표적 건물이었는데.. 이제는 왜소하기만 하니..

▼밤섬과 여의도 스카이라인이 아름답다..

▼국회의사당(맨 우측)도 보이고..

■국회의사당 건립 역사

이승만 정권 시절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짓기로 하고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으나 박정희 정권에서 여의도 개발계획이 수립되면서

여의도에 짓기로 하고, 1968년 당대 최고 건축가인 김수근, 김중업, 이광노 등에 의뢰했으나 설계비를 헐값으로 후려치고, 불투명한 공모절차로 별도의 현상설계 공모를 내었지만 이들은 공모에 참석하지 않았고, 당선자인 안영배를 중심으로 설계에는 참여하였다.

당초 기본 설계안은 돔 구조물이 없는 평평한 지붕이었으나 설계 중 박정희 대통령은 동양 최대의 석조건물로 중앙청(조선총독부)보다 높게 만들라 하였고, 국회의사당 건립위원회에서 "권위가 없다는 여론에 국회총무단, 관계 장관 회의를 거치고, 국회의장단과 건축가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 심의를 거쳐 돔을 올리기로 했다"면서 돔 설치를 결정했지만 설계에 참여한 한 건축가는 "한 사람의 건축가도 의사당 건물에 돔을 올리자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최종 설계에서 건축가들 견해는 반영되지 않았고, 옥상에 돔이 씌워졌는데 돔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동판 자체의 붉은색을 보고, 다른 색으로 칠할 것을 요구까지 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색이 변한다는 것을 설득하여 동판이 점차 산화되어 지금의 푸른색으로 변하면서 원래 설계에 없던 국회 돔은 이렇게 한국 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설계자의 의도와 다른 모습으로 바뀌면서 건축적 측면에서 크게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기에 설계에 참석한 건축가들은 국회의사당을 자신의 작품에 넣지않는다는 것이다.

이로재종합건축사 사무소 승효상 대표는 민의의 전당인 국회의사당은 자기 영토를 확보하고 민의를 차단하는 건물로 진정성없는 건물이라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국회의사당 처마를 받치는 열주(기둥)는 총 24개로, 24절기 24시간 내내 국정에 최선을 다한다는 좋은 뜻을 담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민의와는 동떨어지고 조금도 변하지않는 우리나라 정치인들 수준을 보면서 씁쓸한 기분이 든다

 

▼당초 국회의사당 기본설계안

▼스카이라인은 국민의 삶의 터전과 동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영역에 범접하지 못하게 홀로 잘난 양 떨어져 있는 것이 민의를 외면하

    는 모습으로 보일 뿐, 도시 스카이라인 풍경도 민의를 져버린 국회의사당 건물이 흠결이 되는 모습이니 정치인 수준이 보이는 듯..

▼서강대교

▼현석나들목

▼마포대교 북단

▼마포대교와 63빌딩

▼강변북로 육교..

▼토정나들목

▼좌 측 계단이 마포나루(삼개포구) 입구이다

▼마포나루(삼개포구)

■ 마포구 한강 강안에 있던 나루터로서, 마포나루 강 건너 여의도는 백사장이었고, 백사장을 지나 시흥으로 가는 길이 연결되었다.

마포는 용산강 하류에 있는 포구로서, 서울 남서쪽의 운수교통량이 많은 5강 중의 하나였다. 이곳에는 삼남지방의 곡식과 새우젓 등

젓갈류의 집산으로 유명하였다. 이곳은 소금배가 왕래하며 이를 매매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염리동이 생겼고, 용강동에는 옹리가

있어 젓갈류와 소금 등의 보관에 필요한 옹기를 구워 독막, 동막으로 불렸다. 또한 이곳은 각지에 연결되어 있는 동막과 더불어 번성하였으나 육로 교통의 발달로 차츰 쇠퇴하였고, 마포나루는 마포대교의 건설로 기능이 상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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