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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서울 북촌 한옥마을 나들이

노마GG 2019. 12. 9. 08:03

■ 2019. 11. 30

■ 서울 북촌 한옥마을(서울 종로구 계동)

 예로부터 북촌이라 하여 양반 동네로 알려진 이곳 주택은 모두 조선시대 기와집으로 상류층 구조형태로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원래 이 동네에는 솟을대문이 있는 큰 집 몇 채와 30여 호의 한옥밖에 없었으나 일제 말기와 6.25 수복 직후, 지금 상태로 늘어났다.

북촌 한옥마을은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서울 600년 역사와 함께해온 우리의 전통 거주지역으로 거대한 두 궁궐 사이에 전통 한옥군이 위치하고 있으며, 수많은 형태의 골목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6백 년 역사 도시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전통문화체험관이나 한옥음식점 등으로 활용되어 간접적인 조선시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예로부터 원서동, 재동, 계동, 가회동, 인사동으로 구성된 이 지역은 청계천과 종로의 윗 동네라는 이름에서 ‘북촌'이라고 불리었으며 당시에는 왕실 고위관직이거나 왕족이 거주하는 고급 주거지로 유명하였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몇 채의 한옥들은 이때의 명성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여러 채의 한옥이 지붕처마를 잇대고 벽과 벽을 이웃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풍경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따뜻한 정과 살아갈 맛을 느끼게 해준다. 북촌 지역을 걷다보면 이어진 처마선의 아름다움 만큼이나 골목길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북촌 한옥마을이 지속가능한 관광지가 될 수 있도록 침묵관광을 하도록 주의를 요한다

침묵관광 - 관광객 방문으로 주민 생활권과 환경권이 침해받지 않도록 큰 소리로 떠들지않고 조용히 여행하는 관광형태를 말한다

■ 북촌마을 방문 시 지켜야할 에티켓

  1. 단체관광객 방문시 반드시 가이드 동행

  2. 관광버스 불법주차 금지

  3. 무단 침입, 무단 촬영, 무단 투기, 노상방뇨, 소음 금지

  4. 마을 방문시간 준수

■ 허용시간

  1. 10:00 ~17:00(주중,토) / 일 : 골목길 쉬는 날

  2. 대상지역 : 북촌로 11길 일대 약 100m 구간

■ 북촌 한옥마을 가는 법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328) 2번 출구로 나가서 북촌로를 따라 가는 것이다. 사실상 북촌 한옥 마을은 단일 관광 스팟이라기 보다는 경복궁, 삼청동, 인사동을 함께 연계하여 관광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접근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조금 걷더라도 안국역에서 걸어서 가기를 추천한다. 이유는 중간에 북촌 관광 안내소에서 안내 책자와 지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북촌 골목길이 다소 복잡하고 관광 스팟을 놓치기 쉬우므로 지도를 꼭 받도록 한다. 북촌 한옥 마을 지리가 익숙하지 않다면 구글이나 네이버 지도에서 도착지를 설정해서 갈림길이나 골목길에서 자주 현재 위치를 파악하면서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북촌 한옥마을

■ 운현궁

서울시 사적 제257호로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이고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며, 한국 근대사 유적 중에서 대원군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흥선군 이하응이 왕실 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의 개혁의지를 단행한 곳이기도 하다. 운현궁은 대원군이 권력 하야 이후에도 계속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곳으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였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더욱 크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지고 부터였다. 고종이 12살까지 살았던 운현궁은 철종 때 관상감 터였던 운현궁에 왕기가 있다는 민요가 유행했고, 고종이 등극 후 대원군이 운현궁 터를 확장하였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서운관(書雲觀)이 있는 고개 이름이었고, 서운관은 세조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서운관 명칭인 운관(雲觀)과 운관 앞 고개를 가리키는 운현(雲峴)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고종의 잠저는 당시 대왕대비 교지를 받들어 영의정 김좌근, 도승지 민치상, 기사관 박해철, 김병익 등 일행이 명복(明福-고종 이름)에게 익종의 대통을 계승토록 하기 위해 고종을 맞이하러 최상급의 가마행렬을 갖추어 관현(觀峴)의 흥선군 사저에 갔을 때, 흥선군의 위엄있는 자세와 그의 둘째 아들인 명복의 천진스러웠던 모습에 대한 사실적 묘사에서 운현궁이 고종의 잠저였음을 알 수 있다.

한일강제병합 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으나 실제로 운현궁을 유지, 관리하는 일은 소유권에 관계없이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계속 맡았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어가게 된 것은 1948년 미군정의 공문에 의해서였다. 이후 소유권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대원군 후손 사이에 법적 공방이 있었으나 그 해 9월 21일 결국 대원군의 5대손 이청(李淸, 1936- )씨에게 운현궁 소유권이 확정되었지만 1991년 운현궁을 유지, 관리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면서 양도 의사를 이청씨가 밝힘에 따라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되었고, 1993년 12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