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결에 흐르듯
건축가 안도 다다오 본문
■ TADAO ANDO
1941 오사타 출생
1962-69 독학으로 건축을 배우다가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를 여행함
1969 안도 다다오 건축연구소 설림
1979 <스미요시의 로우하우스>(동측저택)으로 일본 건축학회상
1983 <로꼬 집합주택>으로 일본문화 디자인상
1985 알바 알토상
1986 예술 선장 문부대신상 신인상
1987 <록코 교회>로 제 13회 매일 예술상
1988 <키도사키 저택>으로 요시다 이소야 상
1989 프랑스 건축 아카데미 대상
1991 아메리칸 건축가 협회 명예 회원 아메리카 예술대학 아카데미에서 아놀드 W 브르너 기념상
1992 덴마크로부터 칼수베르그 건축상
1993 일본 예술 원상. 영국 왕립 영국 건축가 협회 명예회원
1994 <오사카 치까츠-아스카 박물관> 으로 일본 예술 대상
1995 프릿커상, 아사히 상
안도 다다오의 건축사고를 살펴 보기 전에 그 배경을 살펴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독학과 여행이다.
고졸출신(기계과)인 그는 실제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다고 볼 수 없다. 오로지 독학만이 그의 유일한 건축공부 방법이었다.
고졸이라는 학력 콤플렉스를 이겨내기 위해 책을 읽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또 걸어다니면서 보고 스케치하며 여행하였다. 건축에 있어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는 직접 건물을 보고 느끼고 공부하는 것이다
그는 미켈란젤로, 아돌프 루스,르 꼬르뷔제, 알바 알토 등의 작품과 수많은 고전건축 등을 보고 발로 공부하며 온 몸으로 느끼면서 독자적인 건축관을 형성하였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사고는 크게 네가지의 틀로 볼 수 있다
1.장소성-시작과 질서
오늘날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환경이 그 장소로부터 자연히 표출되는 것 같은, 질서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느낀다. 이에 대해 안도는 그 건축이 서 있는 장소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한다. 이점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건축대지는 자연이 지닌 고유의 논리로 판단되고 건축도 또한 고유의 논리를 지니고 있다고 나에게는 느껴진다. 건축대지는 늘 인간에게 끊임없이 부르짖고 있다. 자기에 가장 알맞는 건축을 바라는 그 부르짖음은 그것을 들으려고 귀기울이는 자에게만 들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대지의 요구에 어떻게 호응할 것인가가 건축이라는 행위일 것이다."
이는 지형 뿐만이 아니라 그 지역과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 지역의 사람과 문화적 환경 등을 구체화하여 건축을 만들어 가는 것이 장소성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실제로 장소성을 읽어내는 그의 시각은 탁월하며 대다수의 작품에 구체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때때로 그 것은 단지 자연스러운 조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대립과 갈등으로 시작하여 건축을 고유의 장(場)으로 만든다. 주변과 고유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나의 닫혀진 영역으로의 성격을 갖게 하는 것이다.
2.기하학-건축의 추상성
그는 건축의 형태로써 원이나 정방형의 순수한 기하학적 형태를 선택한다. 이는 기하학적 형태를 단순한형태의 조작이 아닌 공간구축과 장소의 구현으로서의 본질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설명하는 예로 화가 요셉 알버스의 '정방형에의 경의 (Homage to the Square)를 들 수 있다. 이 시리즈의 그림들은 정방형이라는 규칙에 스스로를 한정하고 독특하고 투명한 색채를 칠해 관찰자가 진동과 확장을 느끼고 다양한 자유를 발견하게 한다. 기하학적 형태를 벽돌과 중첩, 결합 그리고 삭제함으로써 기하학의 힘에 의해 지어진 건축의 상징성이 어떻게 주위를 자극하고 어떻게 존재의지를 표명하는가 추구하는 것이다.
3.공간- 건축의 구상
건축이란 구상성과 추상성을 동시에 포함하여 성립하는 것이다. 추상성을 진술한 알버스의 '정방향에의 경의'로 설명한다면 구상성은 피라네지의 '환상의 감옥' 으로 설명하고 피라네지의 꿈과 허구의 감옥은 그 압도적인 박력과 비일상적인 공간감각으로 미로성을 확대시켜주는데 이 건축의 육체성 또는 육체의 미로 이미지가 그가 추구하는 건축의 구상성이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은 엄격한 가하학에 의해 구축된 극도로 추상적 존재에서 인간의 육체와 같은 구상성을 띤 공간으로 바뀌어 간다. 즉 알버스적 골결 형태 안에 피라네지적 환상의 미로공간을 깃들게 함으로써 건축의 추상성과 구상성을 동시에 표현하려고 한다.
4.전통-정신과 감성의 계승
안도의 건축을 보면 일본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과 그 만의 개성과 지역성이 녹아서 작품화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의계승은 전통건축의 형태를 모더니즘이 가져온 현대적인 소재를 사용하여 표현한 형태상의 모방이 아닌 '정신과 감성' 을 계승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역사적인 형태의 복사 아닌 과거 문화의 총체로 부터 그 기원을 갖지만 그것이 건축으로 완성되었을 때, 승화되어 단지 형태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안도 다다오의 건축-풍요로운 추상
고바야시 카츠히로
1. 풍요로운 추상
근간 수년, 현대건축이 초기 근대건축이 가지고 있는 생소한 힘을 재평가하면서 그것을 다시 발전시키려 시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지한 바와 같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역사주의가 모더니즘의 부정한 어떤 종류의 구상성을 부활시킴으로써 모더니즘의 막힘을 타파하려고 한데 대해 현대 건축가에 의한 초기 근대건축에의 주목은 초기 모더니즘이 갖는 풍요로움, 생소함, 혁신성을 재고해서 발전시킴으로써 통속화하고 말았다. 모더니즘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어 이러한 발전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 준하고 있다. 안도 다다오는 보기에 현대건축의 이러한 여러가지 움직임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작업을 해온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안도의 이 20년에 이르는 창작활동은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한마리의 이리와 같고 그 자신 현대건축의 여러가지 움직임에 대하여 명쾌한 코멘트를 거의 하지 않는다. 집요한 수도승이 주위세계로 눈을 돌리지 않고 열심히 그러나 착실하게 스스로의 길을 걸어갔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세계에 대해 주위는 그러한 인상을 가지고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도의 일은 모더니즘을 재고하고, 여기에 전력을 준다는 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그가 초기 근대건축, 나아가서는 초기 모더니즘의 최대 유산인 "추상"을 스스로의 창조작업의 기반으로 하는 일에 대하여 "추상"은 모두 근대에 한정한 예술현상이 아니다. 역사적인 건초물 속에도, 추상적인 힘을 느끼게 하는 일도 적지 않다.
그러나 추상적인 것을 의식적으로 파악하려 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예술표현의 수단으로 높이려 해서 성공한 것은 근대 예술가들이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단, 한가지 중요한 것은, "추상"은 초기모더니즘에 있어서는 풍요로움을 갖는 개념이라는 점이다. 즉 추상은 단순히 여러가지를 절삭시켜 단순화하는 것이 아니고 구상으로 넘친 현실세계가 갖는 복잡성, 제모순, 생기라는 것을 어떻게 해서 구상없는 세계를 통해서 질서를 지키게 할 것인지 혹은 구상없는 세계를 어떻게 해서 하나의 새로운 세계로서 표현할 수 있다는 등을 주제로 한 것이다. 안도 다다오의 추상도 역시 어떤 풍요로움으로 차넘친 추상이다.
거의 추상은 현실세계가 가지고 있는 복잡성, 다양성, 모순을 전면적으로 절사시키고 만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깊은 지점에 있어서 정리하고, 추상적인 힘을 통해서 그러한 질서를 지키게 한 것이다. 안도는 또 제각기의 건물이 두어지는 장소의 성격, 혹은 자연, 인간생활이라는 것과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그들을 추상속에 있어서 표현하려 한다.
그러한 건축노력의 결과, 안도의 건축작품은 독특한 풍요로움을 갖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구상, 형사의 지나친 범람을 일으켜 그들에 대한 식상기미의 기분이 감도는 속에서(그렇다고 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전혀 무효라고는 할 수 없지만..) 또 초기모더니즘을 다시 보는 움직인이 종종 형식주의로 떨어지고 말 것 같은 기미가 있는 가운데 안도 독자의 멋진 추상은 대단히 중요한 거점을 구축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안도가 추상속에 풍요로움을 끌어들이려 한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2. 장소성을 둘러싸고
안도 다다오가 늘 스스로의 작품이 두어지는 장소가 갖는 고유의 힘을 최대한으로 살려 나가려느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부지의 형상, 주위환경의 콘텍스트, 지역의 문화적 전통, 기후풍토 - 안도는 이들을 단념으로 읽어 이들에 대한 배려를 추상적 형태로 표현하려 한다. 즉 안도에게는 한편에서 건축과는 제각기 장소에 고유한 1회한의 특수풀이라는 신념이 있고, 한편에서 그러한 것을 표현할 때에는 어디까지나 추상적 또는 보편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는 것이다.
장소성을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추상적인 형태로 표현해 나간다고 하는 방법은 지난 날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나 알바 알토 등이 멋지게 전개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통속화해서 확일화한 다음은 종종 잊혀진 방법이었다.
그리고 70년대 중반 이후, 이러한 방법은 다시 세계 각지에서 몇 사람의 건축가에 의해 채용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안도는 가장 의식적으로 또한 가장 명쾌한 기법으로 이 방법을 발전시킨 것이다. 장소성을 추상적 형태로 표현하는 일과 안도의 이 방법을 생각할 때, 먼저 생각나는 작품은 그의 작업 원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 「스미요시의 아즈마하우스」이다
3채로 이어진 목조장옥이 있고 그 속의 한채를 닫은 중정형의 소우주로서 재생하려 하는 점에 장소적 콘텍스트에 대한 배려가 보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그것을 콘크리트라고 하는 일부러 목조와는 대비적인 소재를 사용, 또 정 4각형평면을, 3등분해서 그 중앙을 안뜰에 댄다고 한 대단히 원형적 또한 추상적인 기하학구성에 준해서 실시한 것이 된다.
다른 예를 들면 교오토타카세천에 면해서 세워진 상업시설 「TIME'S」는 타카세천의 연관이 있는 장소성에서 발상된 작품이다.
물과 바로 접한 광장, 강을 내려다 보는 브리지상의 덱, 가로측이 아닌 강측에서 각 점포에 어프로치된다는 기법 - 이들은 조용한 청류로 면해서 세워진다고 하는 입지를 최대한으로 살리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렇지만 강이라는 자연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습한 배려를 불식하지 않았다. 이른바 건축적, 추상적인 밝은 기법을 채용하고 있다.
근작, 「효고현립 어린이 회관」도 장소성을 추상적인 방법에 의해 높여 간다는 안도의 기법이 유감없이 발휘된 수작이다.
건물은 연못으로 면한 수목이 많은 환경속에 주어졌다고 한다. 도대체 대단히 좋은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안도는 이러한 물, 녹지, 하늘이라는 자연광경을 이상적인 형식으로 즉길 수 있도록 건축의 제요소를 조형한다.
벽은 보아야 할 광경을 한정해서 강조하는 것처럼 배치되어 기둥이나 보는 풍경을 구분해 주는 무선 역할이 주어진다. 단적으로 말하면 건축이 존재함으로써 우수한 환경이 이해된다. 즉 보다 우수한 것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안도의 작품은 거의 이러한 독자의 장소성과 추상도가 높은 보편성을 토합함으로써 성립하고 있다.
국립공원내의 숲이 많은 사면이라는 입지를 이용한 「고시노 저택」, 오키나와의 강한 일사와 무더운 기후에 대치하기 위해 유공블록을 사용한 상업시설 「패스티발」, 잡막한 도시공원속에 삽입된 콘크리트의 자폐적 표정을 갖는 도시 주거군 등 - 안도의 추상적 표현은 이러한 장소에 특질을 채용함으로써 실로 풍요롭고 다양하게 그러나 수미일관한 형태를 유지하면서 전개해온 것이다.
3. 자연을 거두어 들인다.
안도 스스로의 작품속에 자연인 것을 도입했기 때문에 노력을 다해온 것도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 바람, 지형, 빛, 물 이러한 자연요소가 적극적으로 건축공간속으로 거두어 들여진다. 자연을 잃고 있는 현대인간에 대하여 자연의 상태를 느끼게 할 것 같은 건축적 장을 만드는 것이 안도의 건축적 비원과 같은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안도는 절대로 노스탈딕한 방법을 취하지 않다. 현대에 있어서 자연은 이미 근대 이전에 충분히 있는 그대로 자연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간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자연도 추상화해 나간다. 적절하게 추상화된 자연의 것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보다도 자연이 갖는 힘을 전할 수 있다. 이렇게 안도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안도자신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있는 그대로 자연과 교감하는 일보다 건축을 통해 자연의 의미를 변화시켜 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건축이 자연을 추상화한다고 하는 작업인 것이다. 이때 인간은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발견할 것이다 라고 나는 믿고 있는 것이다.」
(『SD』8909「피터 아이젠만의 편지」)안도가 추상화한 자연을 건축속에 대담하게 끌어들인 것은 역시 "스미요시의 아즈마하우스"에 대해서였다. 여기서는 주거자가 방에서 방으로 이동할 때는 항상 외부인 안뜰을 통해야 하며, 이때 비, 바람, 빛, 외기와의 교감이 부응없이 생기게 된다. "스미요시의 아즈마하우스"는 쉘터로서 주거라는 전통적인 주택개념을 벗어 버리고, 그 대상으로 자연과의 교신이라는 미학을 손에 넣은 것이었다
"스미요시의 아즈마하우스" 이후 비, 바람, 빛이라는 자연과 교신하기 위해 장치로서의 건축을 만든다고 하는 작업이 안도의 시종일관 테마가 되었으나 주목해야 할 것은 통상 자연을 말할 때는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안도는 거의 건축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안도에 대해서 너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인 것이다. 안도는 보다 추상적인 자연과의 교감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안도의 일연의 교회가 "물의 교회", "빛의 교회", "바람의 교회"라 이름이 붙여진 것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그들에 있어서도 자연은 극도로 추상화 되어 있다. 예를 들면 "물의 교회"에서 물이 마치 연마되어 있는 거울면과 같이 다루어져 있고, 그것은 사려깊은 조용한 물이라고 하기 보다는 추상적이고 냉혹한 물체로도 생각되는 것이다.
"효고현립 어린이회관"은 안도의 작품 속에서는 풍요로운 자연속에 세워진다고 하는 좋은 입지를 갖는 드문 작품이고, 이 작품에서도 인공못이 나타난다. 그것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그대로 자연의 연못으로 이어져 간다 하는 인상을 주도록 의도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인공못을 자연의 그것처럼 보이려는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된다.
오히려 반대로 자연연못을 인공의 것과 이어줌으로써 진짜 자연조차도 어떤 추상성을 띄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추상화된 자연을 건축속으로 끌어넣는 일, 인간과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려는 일
- 그것은 문명이라는 해독에 침범될 것 같은 현대의 인간생활에 대한 통열한 비팜인 것이다. 과보호가 된 인간이라는데 대한 경고인 것이다. 여기서도 추상이 갖는 힘은 자연과 결합하는 일로 다시 증폭되어, 강력한 비판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4. 인간생활을 끌어들이는 일
안도의 건축이 엄격한 기하학형식에 준해서 구성되는 일은 다시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안도는 가장 라셔날한 성향을 갖는 현대건축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도의 건축은 빛 아래에서의 추상적인 기하학형태의 놀이이다라고 르 꼬르뷔제적인 말로 요약하는 일조차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안도가 다시 위대한 것은 이러한 기하학구성을 사용하면서 인간을 위한 공간, 인간생활을 위한 장, 공공적 성격이 강한 공간을 창조한다고 하는 방향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라셔너리즘은 종종 인간을 무시한 형식, 단순한 형태유희에 떨어진다는 위험을 항상 잉태하고 있지만 안도는 이러한 라셔너리즘의 위험한 한계를 타파하려 한다. 안도는 극도의 라셔너리즘의 위험한 한계를 타파하려 한다. 안도는 극도의 라셔너리스트이나 인간주의자이기도 하다. 인간주의자라 하면 현대에서는 후하고 친절한 이미지를 주기 쉽지만 안도의 인간주의는 엄하고 또한 깊다.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기하학이나 비례라는 형식과 인간 혹은 인체를 합쳐서 생각한 것이나 안도는 그러한 기하학과 인간과의 통합, 추상적 형태와 인간의 감성(인체성)과의 통합을 현대에 있어서 새생하려고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프레임이나 혹은 심메트리한 구성이라는 기하학적 정합성과 생활의 엇갈림속에서 건축에 의해 생활을 조금이라도 방향을 잡을 수 없다는 어떤 의미로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종합성이 높은 기하학적 규율과 인간의 일상생활의 엇갈림에 서로 맞부딪치면서 신선한 공기가 생기는 것이 아닌지, 여기에 하나의 건축 아니덴티티가 명확히 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고 있다.
『건축이란』 안도 자신이 말한 것처럼 그는 추상도가 높은 기하학적 형식을 채용하면서 그것이 인간생활에 대하여 주는 효과, 인간에 대하여 주는 신선한 감동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흥미깊은 것은 안도가 주택작품에서 엄격한 기하학 형식을 사용하면서도 어딘지 엇갈림의 공간을 준비하고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대표적 주택작품인 「K저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부지주위의 벽과 중앙의 큐비크한 기하학 사이에 만들어지는 공간이 이러한 엇갈림의 하나이다.
엇갈림은 이른바, 기하학 형식 규율과 인간생활과의 부딪침을 조정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지만 안도는 기하학에 의해 인간의 생활, 행위에 질서를 갖게하지만 그들을 얽어매서 속박하려 하지않는다. 이러한 추상적 기하학형식과 생생한 인간행위와의 통합이라는 생각은 주택이외 시설로도 주요한 원리의 하나가 되었다. 예를 들면 안도의 대규모 건축 출발점의 하나인 아트,갤러리, 콤플렉스 계획안은 현대미술 갤러리, 소극장, 디자인 오피스 등이 되는 복합시설이나 여기서는 3종류의 프레임과 유리 블록의 곡면벽을 모티프한 기하학 구성에 의해 인간의 제악티비티를 질서있게 한다고 하는 의도가 보이는 동시에 인간행동으로 자유도를 갖기 위한 엇갈린 느슨한 관계도 도입되어 있다. 안도의 이러한 의도는 근작「라이카 본사빌딩」에서 유감없이 표현되었다.
이 거대하고, 유니크한 오피스․빌딩에서는 기하학적으로 구성된 실린더, 그리드, 벽이 제기능으로 질서가 잡힌 배열을 해서 다른 쪽에서 그러한 속에 만들어지는 협간공간, 옥상정원, 트여있다고 하는 보다 완만한 공간이 건축내부로 빛과 녹지를 끌어들여 인간의 일터로 알맞은 창조적인 장을 형성하는 것이다. 「나카노지마 프로젝트Ⅱ」의 지하층 공간에서는 3각형, 원, 정4각형이라는 초원적인 기하학을 모티브로 하여 압도적인 원형공간이 제안되고 있다. 이러한 기하학적인 원형공간자체, 인간의 감성을 흔들어 주는데 충분한 힘을 소유한다. 여기에 순고한 빛이 들어오는 광경은 인간을 압도적인 감동으로 감싸줄 것이다.
현대의 감성이 지금까지 어떤 시대보다 예민하다는 것ㅇ다. 그러나 현대의 감성은 일상생활 속에서 너무나 많은 자극에 접해 있기 때문에 일단 마비되기 쉽지만, 이러한 감성을 진실하게 각성시키기 위해서는 근원적인 감동을 주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다.
- 이 지층공간은 이러한 것을 가리켜 준다. 추상적인 기하학으로 그러한 인간을 감동시키는 힘도 갖추어진 것이다.
5. 역사도, 추상한다
안도만큼 세계각지의 건축을 단념하게 보고 와서 그들을 평대한 양의 단념합한 스케치 속에 기록해온 건축가는 적다.
오랫동안 그의 작품은 건축순례와는 반드시 밀접한 관계가 없는 지점에서 착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안도는 역사를 참조한다는 행위로 부터 무연의 지점에 있다고 간주된 것이다. 그러나 근간 수년 그 자신, 세계 각지 건축 여행에서 창조를 위해 착상을 얻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실제 안도만큼 근대건축을 포함한 역사적 구조물에서 착상을 끌어내는 현대 건축가는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그가 추상이라는 근대예술기법에 준한 창작을 전개하고 있다고 반드시 모순이 있다고는 않는다. 이러한 것은 안도가 과거의 건축에서 착상을 얻는 경우일지라도 포스트 모더니즘의 역사주의가 실시한 것처럼 눈에 보이는 건축현상의 부분을 창조하려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공간의 볼륨, 원형적 형태, 빛을 다루는 방법 등 말하자면 건축 구성 속에서도 추상적인 측면으로서만 배운다는 태도이므로, 안도의 눈은 역사로서 추상한 것이 된다. 안도의 작품을 보고 다시 흥미 깊은 것은 그에게 근대건축의 거장들이 남긴 유산의 대단히 양질인 부분이 유입된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그가 20세 때, 르 꼬르뷔제의 작품집을 구입해서 그것을 침식한 것처럼 바라보고 왔다고 하는 에피소드는 너무나 유명하다.
르 꼬르뷔제 자신도 건축여행을 사랑하고, 역사적 건조물을 추상하는 눈으로 많이 배웠고 또 그가 건축을 빛 아래서 기하학의 놀이라 생각한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르 꼬르뷔제와 안도에 관해서는 이상하게 이미지가 겹쳐진다. 또 미스 반데르 로에가 소년시대부터 청년시대에 거쳐 석공, 목공, 미장이라는 직인적인 일에서 건축가로서 캐리어를 모아 마지막에 세부적으로 신이 묵어간다는 식의 건축철학에 도달한 점도 왜인지 안도의 젊은 시절을 상기시키지 않지만, 사실, 안도도 소년시대에 목공소에서 일했다고 하는 에피소드가 있을 만큼, 그가 세부적으로 중요시하는 건축가라는 것도 주지한 바와 같다.
미스의 바로셀로나․파빌리온 등이 안도 작품과 오버랩해서 보이는 것이 우연이라 할 수 없다. 또 안도가 건축을 기하학에 규범을 두는 점등은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와 상통되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건축에 대해서 엄숙도를 구하려는 태도는 루이스 칸의 건축작품을 꿰뚫는 태도이기도 했다. 콘크리트 벽에 숭고한 빛이 들어간다고 한 건축적 관경도 칸의 유산계승적 발전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이렇게 해서 역사적 건조물 및 근대건축의 거장 에센스가 많이 유입되어 있다는 편이 확실해지고 있다.
이러한 것은 안도의 작품가치를 줄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이다. 건축적 창조란, 항상 과거의 유산, 선인의 노력을 바탕으로 이룩되는 것이며 그들을 어떤 형태로 발전시킬 수 있는지가 중요한 과제이다. 안도는 의심없이 그들을 특히 모더니즘 유산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발전시켰다. 바야흐로 안도를 금세기 건축적 모험의 정통적인 계승자로서 찬양하는 것이 과장된 것은 아니다.
■ 건축의 주변에서
안도 다다오
이세신궁 경내로 이스즈가와라는 냇물이 흐르고 있는데, 나는 이 이스즈가와의 깨끗한 흐름에 마음이 모아졌고, 더욱 아름답다고 느낀다. 오래간만에 찾은 이세의 이스즈가와는 근간 수년동안 잊었던 것을 생각나게 해주었다. 수면에서 눈선 높이까지 길게 이어지는 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것은 물가의 길고 낮은 벽이 자연의 변천이나 연연하게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에는 상상력을 자극시켜 모든 가능성을 환기시키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물>은 색이 있을 것 같으면서 없다. 모노크롬한 물질이다. 그러나 실은 모노크롬의 세계는 무한으로 다채롭기도 한 것이다. 더욱 <물>은 무엇인가를 비쳐주는 거울로 인간의 정신에 깊이 얽매여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의 건축에 있어서 초기 무렵의 플랜은 언제나 수경에 비쳐진 것 같이 심메트리했고, 모든 대칭이 되어있었다. 세월속에 조금씩 그 대칭의 플랜이 허물어 가고 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이유가 일본의 전통적 건축의 깊은 곳에서 나에게 영향을 미친 것을 들 수 있다.
젊은 시절, 쿄오토, 나라에 자주 다닌 찻집건축에서 상가까지 옛 일본 건축을 보고 다녔으나 건축을 시작했을 때 내가 생각한 건축원형을 서양에서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건축을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서양 건축에 있었고 정통적인 일식건축을 부정해 왔다. 단지, 늘 일본의 전통적인 건축은 의식속에 이어졌다고 하겠다. 외국, 특히 서양건축을 많이 보고 난 다음, 일본이 전통적인 건축을 보게 되면 왜인지 마음이 동요된다. 대단히 멋진 건축이 일본에도 많이 있었구나 하고 재확인을 하게 된다.
지금은 너무도 손에 들어오기가 어려운 자연과 인간의 관계성을 다시 확인한다는 의미로서 전통적인 일본건축에서의 시사는 크다.
그래서 최근까지 일본의 전통적인 건축을 공부해 보려고 생각 중에 있다. 그러한 것을 여행을 하면서 비로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책보다 스스로의 부딪쳐 배우는 것이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일본을 먼 외국에서 바라보면 일본에 있었을 때보다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나 일본문화가 잘 보이고 다시 외국의 문화도 자기 손 가까이 끌어모을 수 있다. 스스로 찾아가서 쌍방의 거리를 좁히는 일로, 안에 있는 것이 서로 나의 속에서 교류하고, 자극하게 되므로, 나는 젊을 때부터 자기자신의 몸을 통해서 모든 것을 촉구해 여기서부터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스스로의 체험으로 사고를 쌓아온 나에게 있어서 우선 먼저 자기가 체험해서 재미있는 건축을 만들어 낸다는 소망이 있다. 그 재미라는 것은 사람들의 기대감이라 할까 예상을 배반하는 자극적인 건축같은 것이다.
나는 심볼릭으로 대칭적인 것이면서 그 속으로 들어가면 대칭성을 배반한다거나 단순한 외형을 가지면서 내부는 복잡한 공간이 되고 있다든지, 공간을 체험하는 자를 어떻게 배반할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건축을 완성시켜 왔다. 이때 공간의 전개에서 말하면 보기에 단순한 것이 실은 복잡하리만큼 효과가 있고 재미있다는 느낌을 얻는다. 몸이 포착하는 공간감각과 건축으로 관철된 엄격한 기하학과의 낙차가 크면 클수록 인간은 자극을 받게 된다. 건축에 배반하는 드라마를 잉태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에 깊이 관여하면서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 공간체험을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을 만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있어서의 건축은 다른 양극간을 요동하고, 방황한 끝에 스스로의 의지를 예리하게 수술한 순간에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안팎, 서양과 동양, 추상성과 구상성, 부분과 전체, 역사와 현재, 과거와 미래, 그리고 단순성과 복잡성 등으로 말할 수 있으며 이들 양극의 협간을 항상 오가고 있다. 절대로 정위치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전일한 것과 단일한 것으로 봉인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는 감정으로 성립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개개의 건축을 만들고 있을 때 엄습해 온다. 자신을 가지고 결정한 다음에도 이것으로 될지 불안이 남는다. 막연한 자신과 불안한 감정이 뒤섞인 긴장감, 나는 늘 이러한 양극사이를 요동하면서 건축을 해왔다. 그렇게 해서 만든 과정의 진폭이 클수록 완성된 것에도 그 통일감 속에 다이나미즘이 느끼게 된다.
현대는 어떤 의미로 폐쇄적인 문화상황이라 해도 된다고 생각된다. 특히 건축에 있어서는 그 자신을 성립시키는 문화적 측면이다.
역사나 지역성은 사상되고 그것을 대신해서 경제합리성으로 지지된 단일성과 범용성이 지배하는 상황인 것이다. 모든 것이 기능성, 합리성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무게성으로 균질적인 공간을 확장할 뿐이다. 근대가 만들어낸 균질공간은 기능주의를 철저하게 추진한 결과 얻어진 공간모델이고, 무한정 기능주의를 철저하게 추진한 결과 얻어진 공간모델이다.
무한정한 공간을 확정하며, 거대 건축으로 흥미를 유발시켜 공간이 갖는 특이점을 소각시켰다. 장이 갖는 특수성은 사상되고, 확산되어 간다. 그것과 파라레르하게 인간성을 빼앗기고 "중심의 상실"로 일컬어지는 상황을 확대 생산해가면서 건축은 상품이 되어간다. 한편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이지만 강력한 경제력으로 지지된 건축가의 창의적 표현이 안이하게 실현되는 것 같다.
디자인에 대한 개개의 주장을 무제한으로 외치게 되면 건축은 인간이나 도시의 콘텍스트에서 크게 벗어나 단순한 자기만족의 표현으로 떨어져 간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지에 대해 나의 건축이 출발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사회의 움직임, 건축계의 흐름에 민감해지고 싶으나 그 흐름에 따른 것이 아니라 많은 정보로부터 필요한 것만을 귀를 기울어 만들어 왔다.
근간 20년간 여러가지 건축의 무브먼트가 생기고, 사라져 갔지만, 그들의 유행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를 느끼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데콘트럭션, 그들은 획일화, 균질화를 추구해온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회고로 향하게 되나 결국 형태의 취향을 다투는 표층의론으로 끝나고 말았다. 또 데코스트럭션에 있어서는 제 데리더를 추진자로서 언어중심의 서구문화를 해체하려는 기도를 계획하는 하나의 철학비판의 흐름에서 영향을 받은 데서도 알 수 있다시피 무브먼트자체는 어느 쪽인가 하면 서구문화의 문맥 속에서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이고, 일본인에게 있어서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우리들 자신의 문제로서 다시 한번 차분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20년간의 건축의 여러 가지 무브먼트가 일어나는 가운데 나는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건축이란 무엇인지를 물어 보았다.
그 결과 추상적인 입장이 아니고 오히려 내자신의 몸을 통해서 건축문제를 이해해 새로운 지평으로 건축을 발전시키고자 생각한다.
나의 건축은 기본적으로 모더니즘의 구성방법과 형태에 의거하고 있지만 제각기 장소성, 풍토, 기후 그리고 역사나 문화적 배경을 중시하고,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건축의 원점을 생각해 나가고 싶다. 이것은 추상성과 구상성이라는 상반하는 두 가지를 다이나믹하게 통합한다고 바꿔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추상이란 논리의 명해와 개년의 투명성에 지지된 미학으로도 말 할 수 있다.
추상이란 논리의 명해와 개념의 투명성에 지지된 미학으로 말 할 수 있는 것으로 구상이란 상황의 총체 즉 역사, 문화 풍토, 지형, 시가, 생활 등으로 결부시킨 것이다. 이 양자를 보다 본질적인 형태로 통합시키려 생각해 왔다.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기하학적 추상성이나 그 속에는 많은 구상적인 것이 들어 있고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와 같이 추상적인 것이 구상적인 것과 관련되는 속에서 구성방법이나 형태도 독자의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건축은 형태조작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장소를 설명하려는 인간의 도박이다. 건축에 있어서의 기하학은 건축에 엉겨 붙은 여러 가지 의미를 응축시켜 고유의 의미를 담당해서 변용해 나간다.
그리고 빛, 물, 공기라는 자연은 기하학에 의해 질서가 잡힌 건축기체 속으로 도입되고, 추상성과 구상성과의 사이에서 진동하고 건축을 양자가 잉태한 모습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추상과 구상의 양극간 거리가 넓으면 넓을수록 도입되는 자연이 심하게 섞여 들어간 만큼 건축의 총체에 다이나미즘이 생겨 약동한다. 전후의 주거는 합리성이라는 이름아래 많은 것을 버리고 만 것처럼 생각된다.
그것은 우선 자연과의 접촉이고 살아있는 실감이라 생각된다. 빛의 방사, 바람 흐름, 빗소리, 그러한 신체에 전해오는 것을 버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단순한 외곽 속에 미로적인 것을 만들고, 여기에 자연을 도입해 그것을 통해 살아가는 것이 실감된다.
그러한 생활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늘 생각해 왔다. 예를 들면 「스미요시의 아즈마하우스」에 있어서는 전체가 3분할 되어 있고 그 한가운데에 광정이 있다. 그 광정을 중심으로 해서 미크로코스모를 만들려고 생각했다. 내부로 들어가서 안심하고 있으면 다시 그 속에서는 외부인 안뜰이 나타난다. 건물내부에 반전한 외부를 포함시킨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을 뒤집은 것이다. 본래 내부가 되어야 할 부분이 외부로 되어 있고 공간이 반전해서 불연속이 되어 있다. 이것은 근대건축의 이론에서 본다면 뜻밖의 일이며 기능이 분단되어 있어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불연속이기 때문에 건물내부에 자연이 들어온다.
건축이라는 단순한 상자는 움직이지 않지만 여기에 자연이 바꿔지고 인간의 움직임이 관계되므로 건축이 복잡하게 변화하도록 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구성이 기하학적이며, 단순한데도 불구하고, 내부는 대단히 복잡한 공간을 잉태한다는 것은 통상의 예상, 예측을 뒤집고, 인간의 의식을 자극해서 감각에 변화를 준 것이다. 결국 모더니즘이 제안한 「단순한 상자」는 그것만으로는 참으로 단순한 상자밖에 안 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극하는 복잡성을 잉태시킴으로써 건축을 풍요롭게 하고 싶다.
그와 같은 것을 냉정하게 분석해서 만들어간 것이 아니고, 대부분 알 수 있었던 일로 당시에는 단지 일심불란하게 만들어간 것이다.
규모적으로는 극한이라는 말에 알맞은 이 「스미요시의 아즈마하우스」를 만드는 과정에서 또 이 외로는 많은 것을 배웠다.
예를 들면 소재에 대해서는 무기적인 콘크리트가 빛이나 허공이라는 자연에 의해 풍요로운 표정으로 의논해 오는 공간레벨에서 소재까지 "스미요시의 아즈마하우스"는 그 이후의 건축을 만들어 나가는데 하나의 원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미요시의 아즈마하우스"는 작은 건물이지만 실로 많은 것이 채워져 있다. 나는 이러한 구성법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은 격렬하면서도 조용한 건축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주택을 세운다면 자연을 무참하게 파헤쳐서 단상으로 하는 방법이 일반적이고 기복있는 토지는 평균화되었다. 그러므로 부지는 무성격의 것이 되었고, 부지를 평균화시킨다는 것은 건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을 잘라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을 할 때 록코의 집합주택 일을 하게된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건물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했다. 최초로 부지를 찾았을 때 이 60도의 사면에서 오오사카만이 보이고 훌륭한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곳이 지닌 특성을 되도록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 록코의 집합주택 컨셉이 나온 것이다. 건물의 높이를 억제해서 사면을 따라 가라 앉게 해서 주변의 녹지가 깊은 환경에 융합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줌으로써 옆주거의 지붕은 테라스로서 기능하고 각주거로부터는 바다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모더니즘에 있어서 부정되어 있던 것을 복권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초 계획은 단순히 그리드에 의해 구성하려 했지만 그리드 프레임은 모더니즘 균질 공간의 정통적 표현형식으로 오해되지만 실제는 모더니즘에 있어 부차적인 표현이다. 경계를 철거하고, 수평방향으로 확장되어 가는 모더니즘의 균질공간에서 기둥의 존재는 의미를 소유하므로 추상적이며 균질한 격자점으로 변환해서 그 의미를 소거시키는 것이, 모더니즘에서 프레임이 다름과는 달리하고, 프레임에 의미를 주는 방향으로 사용했다. 여기서 모더니즘을 어떻게 포착하는지 문제의식을 갖게되어 록코의 집합주택Ⅱ의 실마리가 되었고, 획일적이 아닌 주택이 어떤 것인지 생각했다. 나의 건축은 추상성과 구상성을 동시에 표현할 수 없던 것이 커다란 관제이나, 록코의 집합주택Ⅱ는 이 방법의 집대성이라 생각된다.
전체로서는 입방체의 그리드프레임에 의한 단순한 볼륨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 속에 여러 가지 타입의 주거가 복잡하게 배치되어 있다. 왜냐하면 전체를 단일한 논리로 관철시킨다는 것이 귀찮아지고, 건축을 시시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는 모더니즘에 커다란 결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구성으로 보이지만 실은 복잡하며 풍요로운 미궁성을 잉태하는 건축을 하고 싶었다. 이와 같은 일로 나의 뇌리에서는 아르버스와 파라네지라는 다른 두 작가가 생각난다.
화가 아르버스는 "정사각형예찬"이라는 시리즈에서 정사각형이라는 규칙에 스스로를 한정시켜 철저하게 정사각형 형태를 추구하는 가운데 보편적인 것, 영원한 것, 혹은 무한정의 본질로 보는 자유로운 지평으로 향하려 한다. 또 피라네지가 그린 「환상의 감옥」은 나에게 있어서 참으로 복잡하며 육체의 미궁한 이미지이고, 그 압도적인 박력과 공간감각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록코의 집합주택과 서로 전후해서 TIME'S 의 설계를 직접 다루게 되는데 당시의 콘텍스츠어리즘의 문제가 큰 관심거리였다. 주변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은 건축과 대지와의 본래적인 결부를 생각하게 한다.
일본의 정통문화는 4계절마다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과 지리적 및 지형적인 특수성을 빼고는 말이 안된다. 건축은 자율적인 것을 대지로의 삽입인 동시에 대지 자체의 조형이라 생각된다. 부지가 욕심나는 건축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대지가 그 배경을 유지하는 거리의 구조라는 것도 중요하다. 여기에는 과거부터 미래로 이어가려는 사람들의 생활양식이나 습관이 잠재해 있다. 건축 행위는 그들을 찾아내어 얻어지는 작업을 수반한 것이 아닐는지, 나는 형태로서 밖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 즉 모양의 이면에 잠재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계리궁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전통적인 회유식 정원은 물을 중심으로 각 방이 배치되고 전개되어 있다. 나는 이 TIME'S에서 타카세천을 중심으로 입체적인 회유성을 잉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박물관적 시점에서 교토와의 접촉이 아니고, 이 건축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교토의 역사나 문화적 전통이라는 것을 제인식시키는 일과, 타카세천의 물이 손으로 뗄 수 있는 거리를 순서적인 건축을 구성할 것을 요구했다. 철저하게 기하학적이며 단순한 형태로 구상적인 것 및 전통성을 어떻게 교류시켜야 하는지 다시 콘크리트블록이라는 소재가 갖는 튼튼함과 그것이 썩어갈 때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도 생각했다. 합리적인 건축도 잘 보게 되면 비합리적이며 합리성만으로 해결이 안되는 것이다.
건축은 왜인지 설명이 안되고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 반대로 큰 힘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최근에 만들어진 「어린이회관」의 경우 건축뿐 아니라 특이성을 갖는 옥외스페이스(그것을 나는 랜드스켑이라 일컫고 있지만)에 힘을 넣고 있다.
지금까지 사회에서는 가능성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가능성만은 말할 수 없지만 사회속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주어야 한다. 더욱 놀이가 적은 어린이들에게 자연히 격투하는 장을 만들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 건축에서 어린이들이 자신의 놀이를 발견해 간다는 것이 본래적인 어린이 놀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자연속에 랜드스켑 속으로 던져지게 한다. 예를 들면 녹지속을 횡단하는 긴 벽이 있지만 여기에는 지붕이 없다. 자연에서 인간이 생활하는 건축을 만들 때, 기능을 못하는 기둥이나 벽이 합리적으로 배치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과거 모더니즘은 이러한 비합리성을 버린 결과, 마치 같은 시기에 "라이카본사빌딩"을 손댔고, 오피스 공간에 대해서 생각하는 기회를 얻어 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오피스는 기능성, 합리성이라는 점으로 들어가는 것이 십상이다. 현대 오피스빌딩은 인텔리젠트화의 파도가 밀려오면서 한층 더 박차를 가했다 할 수 있다. 표면 마무리가 아름답거나 편리성에 숨어 기능성, 경제합리성 중심의 생각에서 탈각이 안되고, 사람들에게 능률적인 일을 시켜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오피스 공간의 상태가 클로즈업된다고 해도 된다. 본래 인간이란 기능공간에 끼워지는 단순한 부품이 아니고, 창조성을 띤 활동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 오피스에서 일과 생활이 일부라는 의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유가 기능을 만들고, 기능을 둘러싸고 만다는 건축도 있어도 되는 것인지 창조력이나 인간의 에너지가 되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장을 만들어 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다분히 합리성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일이다. 이 건물에서는 거대한 보이드를 잉태하는 실린더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트인 공간이 오피스공간을 둘러싸서 옥상정원을 갖는다. 이들 공간은 쓸데없이 보이지만 이러한 공간이 사람과 사람사이 커뮤니케이션을 유발하는 풍요로운 여유의 장이 되는 것이다.
또 여기서는 1920년대 르 꼬르뷔제 5원칙이 있다. 필로티, 옥상정원, 자유로운 평면, 자유로운 벽면을 건축속에 세상을 열거해 주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내가 처음 구입한 책이 르 꼬프뷔제 작품집이였고 꼬르뷔제로부터는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단순히 작품 이미지라는 것이 아니고, 그의 싸우는 자세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몇 번이나 실패하면서도 원점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하는 자세는 훌륭했다. 예를 들면 1920년대부터 꼬르뷔제와 마지막 50년대의 꼬르뷔제의 작업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비슷하게는 보이지만 실은 1회씩 꼬르뷔제는 자기자신을 무너뜨리고 뒤집어가면서 돌진해 나간 것이다.
또 그가 말하면서 파리에서 그린 도시계획은 실현되 못했으나 늘 어떤 것에도 타협을 모르고 싸워 나갔다는 행위만은 남아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결국 꼬르뷔제로 부터 그러한 자세를 배웠다고 생각한다. 나도 건축발상은 되도록 대담한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현하는데 있어서는 가능한 한 치밀한 계산과 새로운 시스템의 발견 그리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나갈 필요가 있다.
현대 건축은 사회 요청에 따라 디자인하는 일이 많은데 그러한 요청을 그대로 디자인한 것은 아니고 문제점을 원점에서 포착해서 일단 본질적인 레벨로 돌아가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기능조차 피드백해서 생각하고 끝까지 디자인하는 입장을 취하고 싶다.
왜냐하면 건축을 한다는 것은 동시에 비판행위를 포함하는 것이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을 계속해 나가는 동안 건축을 성립시키고 있는 골격이라 할까 개념이라는 것이 명확해지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이 개념성의 강점이라 할까 힘과 같은 것이 건축을 오래 가게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디테일이 깨끗하다든지 마무리가 아름답다는 것은 우연하게 무관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논리가 투명하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구성의 논리가 명확하며 그 논리가 구석구석까지 꿰뚫을 수 있다.
그것은 그렇고 다시 말해서 공간질서이며 지각을 초월한 이성에 의해 인식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자칫하면 투명성이라는 것은 표면적인 아름다움, 단순한 기하학성을 받아 들여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일관된 논리에 그 투명성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투명논리로 지지되어 구성된 건축 속에 자연이 흡수되어 물, 빛, 허공이라는 자연은 건축을 형이상학적 존재에서 지상으로 되돌려 인간이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숨결을 느끼게 한 것이다. 건축과 자연의 관계를 묻는 것은 동시에 건축의 시간 속으로 포착하도록 한다. 나는 시간감각에 큰 웨트를 두고 싶다. 변천이라든지 시간의 추이가 공간체험으로 되어 있을 것 같은 구성, 그것은 그 체험을 하는 인간의 감수성레벨에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수한 일본정원이라는 것은 절대로 멈추지 않고 늘 움직이고 있다.
예를 들면 이끼나 나무들 혹은 찾아오는 새들이 해마다 혹은 계절을 따라 또 시간으로 미묘하게 변화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부분이라는 생명이 말하고 그리고 전체라는 새로운 생명을 형성해 나간다. 그와 같이 마치 생명체와 같은 완결이 없는 시간 속에 있는 정원을 바라보면서 자칫 거기도 살아 있는 건축, 시간 속에 떠돌아다니는 건축이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지 않을 지라도 생각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건축은 어떤 의미로 만든 사람 생각을 정지시켜 완성해야 한다. 시간개념이 잘 표현이 안 된다.
부분을 그리면서 전체를 순간으로 포착하면서 영원을 잠깐 보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 「어린이회관」둘레에 어린이를 위한 시설이 몇가지 만들어져 있다. 여기서는 무성한 산과 아름다운 물을 채운 풍요로운 자연속에 시설이 점재하도록 했다고 생각한다.
기하학적 질서있는 건축을 만들면서 한쪽에서 바람이나 물, 태양이라는 자연이 건축을 요동시켜 나간다. 모두 다른 요소가 겹쳐지고, 통합시킴으로써 인간의 혼을 진동시킨다. 그러한 사람과의 대화가 가능한 건축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만들어 나가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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